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스마르크해 해전 (문단 편집) == 발단 ==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나던 1943년 1월말 무렵,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인 파푸아 반도 일대에서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축출되고 있었다.([[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 과달카날과 동부 뉴기니 동남부를 잃은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 일대와 뉴기니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미군의 공세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군 [[대본영]]은 파푸아 반도를 비롯한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부나-고나 일대를 기점으로 동쪽 지역]를 일단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동부 뉴기니 전체를 아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동부 뉴기니 전체가 미군 손에 떨어지는 순간엔 뉴기니와 뉴브리튼섬 사이의 비티아즈 해협(Vitiaz Strait)과 댐피어 해협(Dampier Strait)을 거쳐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 일대로 통하는 해상 진격로가 열리게 되며,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뉴 브리튼 섬의 라바울이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대본영은 과달카날에서 철수를 결정함과 동시에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의 요충지를 공략하여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뉴기니 전역의 [[일본군]]은 부나- 고나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해안지대의 [[라에]]-살라모아 지역을 최전방 거점으로, 다시 북서쪽 방향의 마당-웨왁 지역을 후방 거점으로 하여 육군 3개 사단을 증원하여 이 일대 방어를 강화하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대본영은 아예 한술 더 떠서 1942년에 공격에 실패했던 포트모레즈비를 육로를 통해 다시 공격할 생각-그러니까, [[코코다 트랙 전투]]를 시작 하던 당시와 똑같은 생각-도 갖고 있엇던 듯 하나, 현지 사정, 특히 험난하기 짝이 없는 지형을 체험한 라바울 현지 사령부에서는 이런 분위기에 반발했다고 한다.] 이 계획에 따라 3개 사단 중 2개 사단이 1월~3월에 걸쳐 마당-웨왁지역으로 배치가 예정된다. 이 계획에서 요충지로 떠오른 곳이 와우였다. 라에-살라모아에서 남서쪽 내륙 산악지대에 위치한 광산 마을[* 금광이 있다.]인 와우는 일찍부터 연합군 세력에 들어가 있던데다[* 일본군이 뉴기니에 쳐들어오자 현지인으로 구성된 친 연합군 민병대가 결성되었고, 연합군 병력도 조금씩이나마 증원되고 있었다.] 비행장도 있어서 라에-살라모아 지역에 대해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뉴기니 일대의 일본군도 이 지역을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다만, 과달카날 전역과 뉴기니 동남부에서의 격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이쪽에 병력을 돌릴 여유[* 병력 수송에 필요한 함선, 수송선들이 죄다 솔로몬 일대의 임무에 투입되고 있었다.]가 없었으므로 와우와 해안지대로 통하는 길목만 차단하고 있었지만, 1943년 1월 초에 연대규모의 일본군이 증원되면서 와우지역을 점차 위협하기 시작했다. 부나-고나 전투가 마무리되어가자 호주군과 미군은 라에-살라모아 지역 공략의 교두보로서의 와우의 가치를 깨닫고는 와우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증원을 명령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도 와우를 공격했지만 지리에 어두웠던 상태로 살라모아-와우로 이어지는 밀림으로 뒤덮힌 험난한 산길[* 이른바 블랙캣 트랙이라 불리는 곳으로 격전이 있었던 코코다 트랙 못지 않게 험난한 길이다. 와우에 일찌감치 비행장이 들어선 것도 이 육로를 통한 이동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을 진격로로 택했다가, 진격과 보급이 지체[* 지리에 어두웠던 탓에 기존에 있던 길이 아니라 잘 안쓰이던 길을 억지로 찾아가던 통에 행군하다가 길을 못찾고 도로 되돌아가거나, 호주군을 코앞에 두고는 길을 잃어 공격 일정을 연기하는 등 혼란상이 연출되었다. 이로 인해 갖고 있던 식량도 다 떨어지고 결국엔 풀 뜯어 먹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거 영락없는 과달카날...--]되고 [[폭격기]]와 [[수송기]]를 동원한 연합군의 증원까지 맞으면서 공략에 실패했다. 이 전투를 거치면서 와우는 3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었다. 와우가 본격적으로 연합군의 교두보가 되자, 일본군은 상기한 방어 계획에서 배치 지역을 미처 결정하지 않은 1개 사단[* 앞서 와우를 공략했던 연대 병력도 바로 이 사단의 예하부대였다.]을 전방 지역인 라에- 살라모아 지역에 곧바로 배치하기로 결정한다. 동부 뉴기니에서의 방어와 반격을 종용하던 대본영의 압박과 육로 이동이 매우 열악한 뉴기니 현지 사정[* 전방인 라에와 후방인 마당은 직선 거리만 따져도 200km를 훌쩍 넘겼으며 실제 이동 거리는 이것보다 더한데다 도로마저 정비되지 않았다.]이 겹친 결과였다. 이에, [[일본 해군]][[소장(계급)|소장]]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 지휘하에 8척의 [[구축함]]과 8척의 육군 수송선을 통해 약 7,000명의 증원 병력과 물자를 호송하는 계획이 세워진다. 이 호송계획은 솔로몬 일대에서의 수송작전에서 교훈을 얻어서 각 수송선은 필요한 물자의 종류와 인원을 조금씩 나누어서 균등하게 적재하여 만일 수송선이 거의 다 격침당해도 1척만 도달하면 부족하나마 제대로 된 증원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구축함과 수송선의 승조원들도 되도록 이런 종류의 작전에 경험이 많은 자들을 선별했고, 보트와 주정을 많이 적재해서 변변한 항만 시설이 없는 곳에서도 빠른 양륙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선단을 호위하는 [[항공기]]도 100대를 뽑아낼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이 수송작전의 최대 위협은 연합군 항공기들이었다. 앞서 와우를 공략했던 부대도 라바울에서 라에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항공공격을 받았으며, 와우를 공략할 당시 항공기를 이용한 지형정찰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도, 지도상 최단거리만 찾다가 진격로를 험난한 산길로 택했던 이유도 제공권이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군 수뇌부는 연합군이 자신들의 의도를 모르는데다 이 일대에서의 연합군 가용 항공전력이 적어서 설령 중간에 들키더라도 집중적인 항공공격을 받지는 않을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수송작전의 실무를 맡던 현지 사령부와 예하 일선 부대에서는 앞선 와우 공략 부대의 수송작전 당시 연합군의 항공 공격을 직접 겪어봤던 터라 성공확률보다 실패확률을 더 높게 치거나 잘해야 반반의 확률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 일선부대의 우려는 상당부분 맞아 들었다. 연합군은 이미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으며[* 앞서 언급한 일본군 연대규모 공격대가 라바울을 출발하던 당일에 맞춰 이들이 탄 선단을 목표로 공습을 가할 정도 -비록 간발의 차이로 선단은 놓쳐버렸지만- 로 연합군의 정보력은 상당하였다.] 2월 중순경엔 일본군 증원병력의 상륙 지점을, 2월 말에 이르면 라바울 북쪽으로 출발하여 뉴브리튼섬 북쪽을 항해하다가 뉴브리튼 섬과 뉴기니 사이의 해협을 통해 라에로 향할거라는 예상 항로까지 모두 파악했다.[* 앞선 와우 공략부대는 뉴브리튼섬 남쪽으로 향하여 최단거리 코스로 항해했으나 연합군 항공공격에 쉽게 노출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예상보다 약 1.7배의 항공 전력을 갖고 있었으며, 일본군 수송선단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전술도 가다듬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